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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1-09 04:29
"12킬로? 1.2킬로가 아니고요? 와, 진심 미쳤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79  

"12킬로? 1.2킬로가 아니고요? 와, 진심 미쳤다"

[필름사진 여행기] 학생들과 함께한 신년 해맞이 해파랑길 걷기
19.01.08 20:15l최종 업데이트 19.01.08 20:15l
본 기사의 사진은 모두 네거티브 필름을 이용해 촬영 후 직접 스캔하였으며 사이즈 조정 등 기본적인 보정만 했음을 밝힙니다. 사진마다 기종 및 필름의 종류를 괄호 내에 표기하였습니다. [기자 말]

작년 한 해도 여느 때처럼 수차례 현장체험활동을 기획하고 인솔했다. 교외 체험활동과 관련하여, 학교 내 회계에서 지급되는 표준교육비와 교육청에서 내려오는 목적사업비를 모으면 제법 풍성한 예산이 마련된다. 일반고를 꾸려가는 교사들은 해마다 이 예산을 소진하기 위해 설명서 없는 고민을 반복한다.

가장 좋은 체험활동은 교과와 연계된 활동이다. 이는 학생들에게 현장감 있고 살아있는 교육자료가 되어준다. 학생들은 교과서 밖에서 만난 다양한 상황들을 통해 적응력을 키우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다.

보통의 체험활동은 1년 전에 연간계획과 함께 짜여지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 행사는 불현듯 기획된 것이었다. 학생회나 동아리 대표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통솔력과 자신감을 키워줄 것인가'를 토론하다가 툭 튀어나온 아이디어였다. 수익자 부담이 아닌 학교의 전적인 지원으로, 힘차게 떠오르는 신년 해를 맞이하는 행사를 기획하면 해당 학생들의 사기를 북돋워 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황금돼지해의 첫 일출경 (645N/Pro400H)학생들과의 단체사진을 찍은 후 조금 더 떠오른 태양.ⓒ 안사을
 
평소 여행을 좋아하고 학생들과 함께하는 것을 즐기는 나에게는 참 신나는 일거리였다. 잽싸게 사전답사 일정을 짰다. 숙소와 식당을 들러서 정확하게 예약을 하고 학생들의 도보 동선 등을 미리 파악하여 안전을 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전답사를 무사히 마치고 계획서까지 모두 승인을 받은 후 갑자기 강릉 펜션 사건이 터졌다. 세월호 사건 후 수많은 수학여행이 취소되었듯, 이번 행사 역시 순탄치 않을 것을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학생들이 하나둘 나를 찾아왔다. 막상 내 앞에 서서 학생은 주뼛거리며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선생님. 그... 제가 드릴 말씀이..."
"이번 체험활동 못 간다고? 강릉 사건 때문에 부모님이 걱정하신다고?"


학생의 침묵을 가로채어 말을 이었다.

"일단 너는 가고 싶어? 네 마음은 어때?"
"아, 쌤. 저는 당연히 가고 싶죠. 완전 기대했다고요."
"그럼 일단 기다려봐. 선생님이 알아서 할게."


학생은 두말 없이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그다음 날 나는 3시간에 걸쳐 모든 보호자에게 전화를 돌렸다. 사전답사 결과를 유선상으로 공유했다. 행사 당일 하루에 두 번씩 안전 상황 등을 문자로 통보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피치 못할 상황이 있는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함께 가게 되었다. 사전 협의회에서 아이들은 모두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 자신들에게 닥쳐올 시련이 무엇인지는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12km의 구보, 멀고도 먼 길

전주에서 출발한 버스는 뒤가 급한 학생을 위하느라 휴게소에서 두 번을 쉬고 오후 두 시에 울산 정자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해파랑10길'이 시작된다. 우리는 정자항에서 출발하여 경주 양남 주상절리 지점까지 장장 12km를 걸었다. 애초에 고지했던 내용이지만 절반에 가까운 아이들은 역시 '안 배웠는데요?' 기술을 시전했다. 

"12킬로요? 1.2킬로가 아니고요?"
"아, 어쩐지 아까 버스에서 쌤이 해지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고, 왜 대낮에 해질 걱정을 하시나 했네요."
"와, 지렸다. 진심 미쳤다."


아이들은 시쳇말로 '급식체'를 쏟아내며 주섬주섬 먼 길 갈 채비를 했다.
 
정자항 쉼터 (Horseman612/Portra400)자연친화적인 시장이 아닐 수 없었다.ⓒ 안사을
 
춥다느니, 멀다느니 하던 불평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보니, 학생들은 동해의 파도에 그만 마음을 빼앗겼나보다.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발을 손에 든 채 걷는 녀석도 심심찮게 있었다. 여행지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점프샷' 역시 단골 메뉴였다.
 
점프샷 (645N/Pro400H)ⓒ 안사을
내가 이 바다의 왕자다! (645N/Pro400H)ⓒ 안사을
강동동 바다의 모습 (Horseman612/Portra400)바람이 거세지 않았음에도 파고가 꽤 높았다.ⓒ 안사을
 
가장 처음으로 멈춘 곳은 '강동 화암 주상절리'였다. 이곳에서는 주상절리가 가로로 누워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약 2천만 년 전에 이러한 지형이 만들어진 원리에 대해 간단하게 강의를 하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강동화암주상절리에서 (645NPro400H)ⓒ 안사을
강동화암주상절리에서(2) (645N/Pro400H)ⓒ 안사을
강동화암주상절리에서(3) (Horseman612/Portra400)사전답사 때 담은 사진. 답사 때 날씨가 더 좋았다.ⓒ 안사을
 
이곳까지는 정자항에서 2km 남짓 떨어져 있는, 그러니까 총 경로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거리였을 뿐이었다. 여기서부터 이미 지친 듯한 학생들과 간단명료한 대화가 10번은 더 반복되었다. 

"쌤. 우리 가야 하는 곳이 어디예요?"
"응? 여기서 안 보여" 
"헐..."
"쌤. 여기서는 보여요?"
"보일라면 멀었어."
"헐..."


해파랑10길은 정자항에서 나아해변까지의 길이다(13.6km). 해파랑길의 전체 구간은 총 50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고 부산부터 쉬지 않고 연결되어 고성까지 이른다. 인솔교사로 함께 자청한 한 여선생님은 이 길을 모두 걷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 시작을 학생들과 함께 하니 이 또한 영광이었다고.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이 있다면 차로와 분리되지 않는 구간이 꽤 되었다는 것이다.  차량과 사람과의 분리는 파란색 페인트 한 줄이 전부였다. 물론 대부분의 길이 마을길 수준의 길이면서, 자전거 및 도보자 우선의 도로였기에 위험한 상황은 없었다.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걷기 길 (645N/Pro400H)ⓒ 안사을
걷기 길? (645N/Pro400H)이 길을 인솔할 때는 특히, 차량나 학생들이 서로 선을 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거의 뒤로 걷다시피 했다.ⓒ 안사을
 
하지만 불법 주차된 차량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 밖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아, 뒤에 차가 오지는 않는지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해파랑길 홍보 웹페이지에는 이 길이 '걷기 길'이라고 명백히 나와 있으나, 실제 길에는 자전거 표시밖에 되어있지 않아서 안정감을 갖고 편히 걷기는 어려웠다.

상점이나 주택 때문에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자체에서 주차금지봉을 쭉 심어야 할 것 같다. 더불어 '걷기 길'이라는 표식이나 경계를 뚜렷하게 해주어, 여행자들이 보다 여유로운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기를 바란다.

양남 주상절리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5시 45분이었다. 3시간 45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걸었으니 운동이 되어도 꽤 되었을 것이다. 해가 짧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다행히 6시부터 전망조명이 켜진다고 했다. 어둠 속에서 부채꼴 주상절리의 희귀성에 대해 잠시 안내했다. 

이윽고 불이 켜지자 학생들은 제각기 감상평을 내놓았다. 생각보다 크고 예쁘다는 표현이 대부분이었다. 사진은 밝을 때 미리 찍어두었던 사전답사 때의 것으로 대신한다.
 
부채꼴 모양의 양남주상절리 (Horseman612/Portra400)천연기념물 제536호로 관리되고있는 양남주상절리군 중 백미. 위와 같은 부채꼴 모양의 주상절리는 전 세계적으로도 희소성이 있다. 풀프레임 기준 14mm 정도의 초광각 화각으로 담아서 작아보이지만 꽤나 규모가 크다.ⓒ 안사을

기해년의 첫 번째 해를 맞이하다

아이들의 인기척이 새벽 4시가 넘게 계속되었다. 약속한 기상 시각이 되기까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펜션 사고로 마음이 티끌만큼은 쓰였으니 인기척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소란스럽지 않아서 크게 제지하진 않았고, 약속한 시각에 집결할 것만을 다짐받았다. 

일출 시각은 약 7시 20분이었다. 7시부터 해변에 모여 새벽 미명을 감상했다. 해가 떠오른 후보다 그 직전이 더 아름답지 않으냐고 알량한 미학적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삼각대에 외장 플래시까지 장착을 해 놓고, 미리 준비한 현수막과 함께 대열을 가다듬었다. 누군가가 자그맣게 외쳤다.

"와, 뜬다. 떠!"

기해년 첫해가 야트막한 구름의 언덕 위로 수줍게, 혹은 장엄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일출 (645N/Pro400H)미명을 깨고 오르는 뜨거운 태양ⓒ 안사을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외장플래시 광량을 최대로 올리고 오래된 필름카메라에 타이머를 걸었다. 셔터를 누르자 얼른 오라고 아이들이 성화다. 급하게 대열에 합류하느라 표정 관리는 뒤로 하고 주먹만 불끈 쥐었다. 2019년의 첫 번째 교육활동 사진을 담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감격 어린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삼삼오오 숙소로 향했다. 그때 눈앞에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한 학생이 타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또 다른 녀석에게 큰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 서로를 도와 핸드폰으로 영상을 촬영하는 중이었다.

그의 대사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 큰따옴표로 인용은 못 하지만, 대략적인 내용인즉슨, 새해를 맞이하여 하는 새 다짐을 부모님께 보내며 드리는 문안인사였다. 사랑한다는 말도 들렸다.

입가에 웃음이 돋았다. 교과서 밖에서 이루어진 1박2일의 수업 시간 동안 이 학생은 효도를 배웠나 보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어떤 배움이 일어났을까. 이 행사에 참여한 모든 이의 마음에 작은 파동이 일었기를 신년 첫해 앞에서 간절히 바랐다.
 
단체사진 (645N/Pro400H)다른 관광객들을 화각에서 빼느라 해를 정중앙에 놓지 못했지만, 뜨거운 소망 만큼은 모두의 마음 한 가운데에 떠올랐으리라.ⓒ 안사을